어거스틴은 누구인가
어거스틴은 라틴어로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하는데, <신국론>, <참회록> 등을 지은 대표적인 교부이다. 그의 저작 <영과 문자(De spiritu et littera)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과 관련이 있으며, 어거스틴의 말년에 저술된 후기 저작이다.
저작 제목의 의미
저작의 제목인 영은 성령을 의미하고, 문자는 율법을 의미한다. 이것은 로마서 7장 8절 말씀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와 관련이 있으며, 로마서 10장 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와도 연관이 된다. 그러나 가장 뚜렷한 대비를 볼 수 있는 구절은 고린도후서 3장 6절인데,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에서 율법 조문은 문자, 새 언약과 영은 신약과 성령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작의 성격
어거스틴의 말년인 412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의 후기 저작이 그러하듯이, 전문 신학자를 대상으로 하였다기 보다는 설교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글 전체를 보아도 철저하게 논증적이라기 보다는, 율법을 통해서는 의에 이를 수 없고,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일관적인 논조를 보이고 있다. 또한 여러 철학자나 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기 보다는 주로 성서 본문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진 대중을 상대로 쓰여진 설교글과도 같은 성격을 지닌다.
저작의 저술배경
이 글의 저술배경이 되는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력을 강조하고, 구원에 있어서 은총의 의의를 부정하였다. 이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강한 반박을 받았다. 이 점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면 죄가 없는 인간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을 자기 안에서 살게 하시는 한 분 빼고는 이 땅에 사는 누구도 이러한 완전함에 도달한 자가 없었고 또 없을 것이다’고 말함으로써 노력으로 완전함에 이를 수 없음을 강조한다.
자유의지
어거스틴은 자유의지에 대하여 ‘자유의지는 죄 짓는 것 밖에 다른 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선천적으로 주어진 자유의지를 가지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되면 축복되고 영원한 삶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우리가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함께 하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
문자는 오래된 것이고, 성령은 새로운 것이다. 문자는 구약에 해당하고, 성령은 신약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율법은 죄인을 만들고, 신약의 성령은 은총과 사랑을 선물로 주신다. 그렇다면 어거스틴은 구약을 부정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은혜가 구약에 숨겨져 있다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율법은 죽음의 직무이며 정죄의 직무이고, 신약의 직무는 영과 의의 직무이다. 성령의 선물로 인해서 우리는 의를 이루며 범법함의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다.
글을 읽고 알게된 점
어거스틴의 성령과 문자를 읽으면서 현대 한국교회에서 복음이라고 가르치는 것, 즉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에 의하여 의롭다함으로 인치심을 받아 구원에 이른다’는 내용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력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대립적인 사상과의 투쟁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교부들의 노력
또한 영지주의와의 대립 속에서 결국 구약의 창조주를 긍정하면서 신학을 정립해야했던 교부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인간의 불순종과 원죄로 인하여 시작되었지만, 그것을 심판하는 율법은 결국 불완전하고 우리를 죄인으로만 만들기 때문에, 신약이 필요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론을 만들면 구약의 창조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 수 있다.
개인적인 견해
흥미로운 점은 구약 자체와 구약의 율법, 구약의 창조주는 부정되거나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게 되었지만, 그리고 구약의 예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메시아의 정당성이 마련되었지만, 이러한 주장은 어쩔 수 없이 자기 파괴적인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신약의 토대가 되는 구약이 불완전한데, 그리스도의 정당성이 구약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정당성도 불완전한 것인데, 구약을 비판하면서도 구약을 경전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모호한 경우가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너무 일찍 임종하셨기 때문에 정작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았고, 구약을 토대로 그리스도를 이해했던 유대인들에 의해서 열심히 전도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결국 구약의 내용들에 의해서 재해석되어졌던 것 같다. 그러한 재해석의 시작은 바울이었고, 사도들이 전달했고, 교부들이 체계화하였다.
바울이 독창적 사상가로서 구약을 비판하고 복음을 전한다지만 결국 구약적 사고방식 속에서 이해된 그리스도인 것이다. 교부들이 권위와 학식을 갖고 세밀하게 바울의 사상을 체계화하였겠지만, 결국 ‘영과 문자’는 모순적인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글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어거스틴이라는 교부는 사변적 지식만으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분명 성령체험이 많았고, 그것을 토대로 신학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성령의 은총이란 무엇이고, 은총을 통해 어떻게 구원될 수 있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이 드러나있지 않다는 것이다. ‘성령과의 연결 속에서 자유의지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가면 구원받는다’는 내용은 어거스틴이 직접 체득한 살아있는 내용이고, 그것을 뛰어난 재능과 학식으로 체계화하여 저술을 잘 하였다. 그렇지만 그 다음의 이야기는 물음표이고 공백이다.
어떻게 보면 신학은 성경해석학이고, 교부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들의 신학은 자기가 아는 만큼의 성경묵상록이다. 바울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배워서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자기 안에서 이루었더라면, 어거스틴이 ‘두려움을 넘어선 완전한 사랑’을 이루었더라면 기독교 신학은 더 심오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새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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